조산보 만호 이순신 장군과 6.25전쟁 국군 3군단장 유재흥 장군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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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8. 4. 14:03 밀리터리

우리나라 역사를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은 이미 이 두분의 성함을 익히 들어 잘 알고 계실겁니다. 유재흥 장군의 이름이 생소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순신 장군을 모르시는 분들은 아마도 없으시겠죠. 오늘은 이 두사람의 패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으로 절대로 적군에게 패한적이 없는 뛰어난 장군으로 알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도 한번은 적에게 부하들의 목숨을 내어준 뼈아픈 기록이 있답니다. 유재흥 장군은 6.25전쟁 당시 3개 사단으로 이루어진 3군단을 거의 궤멸 상태로 만든 유명한 장군인데요. 이 두분의 패전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서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조 20년인 1587년은 남쪽과 북쪽 모두에게서 외침이 있었던 해라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쪽에서는 일본 왜구의 대규모 침략으로 전라도 해안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고 북쪽으로는 점점 승승장구하면서 세력이 커져가는 여진족의 침입으로 조선 백성들의 삶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답니다. 


김명민 이순신장군

녹둔도사진 나무위키


이순신 장군은 녹둔도 둔전관이자 조산보 만호라는 직책을 받아 함경북도에서 계셨던 시기입니다. 녹둔도는 지금은 러시아 땅으로 귀속이 되어 앞으로 우리나라가 다시 찾아와야 하는 땅이지만 그 당시에는 식량이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농사 기술이 부족했던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죠. 


여진족은 아시다시피 유목민족으로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 군대로 침입을 해왔지만 1587년 당시에는 그 세력을 점점 키워가면서 그 숫자가 그 지역일대를 방어하는 조산보 관군의 몇배가 되었답니다. 추수철이 다가오면서 식량이 부족해진 여진족은 그 세력을 규합해서 조산보로 침입을 하고자 계속 염탐을 하고 있었는데요. 


패전지장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여진족 침입에 대비하여 적정을 순찰하고 지속적인 척후 활동을 벌였습니다.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직속상관인 경흥부사 이경록과 북병사 이일에게 병력을 지원을 계속 요구했지만 묵살당하고 말았죠. 여진족의 대규모 침입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이순신 장군은 경흥부사 이경록에게 지원을 요청하러 잠시 전장을 이탈합니다. 지원군과 함께 도착한 녹둔도는 이미 많은 사상자를 내고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여진족의 포로로 끌려갔답니다. 이순신 장군과 이경록 장군은 여진족의 뒤를 쫓아 적장을 사살하고 60여명의 포로를 구출하였습니다. 


이에 북병사 이일은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적어 장궤를 올렸고 조정 중신들은 이순신을 참해야 한다고 선조에게 간언을 올렸었죠. 선조는 뜻밖으로 백의 종군을 명하였습니다. 백의 종군은 장군에서 이등병으로 강등이 되는 아주 치욕스러운 불명예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패전지장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이후 2700여명으로 구성된 조선 관군을 이끌고 여진족 부락을 급습하여 주요 근거지를 모두 섬멸하는 전공을 올리게 됩니다. 바로 시전부락 전투이죠. 많은 조정 대신들과 선조는 녹둔도의 패전이 조산보 만호 이순신에게만 있지 않다고 실록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장을 적절히 판단하고 급박하게 지원을 요청했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북병사 이일은 이 정당한 지원요청을 여러번 묵살했지요. 상관의 책임과 이를 은폐하고자 했던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유재흥 장군의 혁혁한 한국전쟁의 전공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재흥 장군은 1921년에 태어나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55기)하고 일본군 장교로 근무를 했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종전되기 직전에는 일본군 대위로 있었다고 하지요. 


유재흥장군

유재흥사진


한국군에는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5월 12일 6사단장으로 임명이 됩니다. 이 당시 나이가 28살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전 7사단장으로 보임을 받았습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7사단을 이끌고 양주 덕정과 의정부에서 서울 북부 창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패전을 반복하다가 7사단 자체가 궤멸되고 맙니다. 


한달 후인 1950년 7월 경북 함창에서 2군단이 창설되면서 2군단장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몇개월 뒤 그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북진을 하게 됩니다. 겨울이 되어 가면서 승전의 분위기를 자축하던 우리 국군과 UN 연합군은 중공군의 침공으로 후퇴를 하게 되고 말지요. 이때 2군단이 덕천 전투에서 중공군을 방어하게 됩니다. 


참호를 파고 대치중인 중공군


당시 지휘부의 실수로 중공군 38군과 42군에게 포위를 당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데요. 이때 2군단이 전멸을 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이런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해인 1951년 3월 육군 3군단장으로 다시 유재흥 장군이 임명이 됩니다.


끌려가는 국군포로현리전투에서 포로가 된 국군들


여기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투를 꼽으라면 임진왜란 당시 원균이 이끌었던 칠천량 해전입니다. 이 당시 조선 수군은 2만명이 전사하면서 사실상 궤멸이 되었죠. 병자호란 당시 쌍령전투 또한 소수의 청기병에게 몇만의 조선군이 패한 말도 안되는 전투입니다. 그리고 유재흥 장군의 현리 전투가 있습니다. 


현리 전투는 1951년 5월 16일에서 22일까지 강원도 인제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한국군은 7사단, 9사단, 3사단으로 이루어진 3군단이 이 지역일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12군단, 27군단, 북한군 5군단이 공격을 감행을 하였는데요. 유엔군의 보급과 지원으로 개전 당시보다 훌륭한 화력을 동원하고 있었던 우리 육군은 중공군 한개 중대가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를 점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도주하기에 이릅니다. 


3군단은 고급 장교에서 병사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주를 하였다고 하는데요. 제대로된 지휘관들도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떼고 무질서하게 도주를 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2만명에 가까운 병사들의 목숨이 희생되거나 포로로 잡혀갔고 나중에 복귀한 병력은 2군단 전체 병력의 40% 정도였다고 합니다. 미군이 제공한 운송수단과 무기는 모두 남겨 놓았기에 적군의 손에 넘어갔지요. 


밴플리트밴플리트 장군


이 현리 전투에는 2군단의 최고 지휘관인 유재흥 장군이 없었습니다. 유재흥 장군은 연락 비행기를 타고 도주를 한 상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나중에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갔다고 했는데요. 당시 참모총장인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유재흥 장군은 작전회의에 참석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미8군 사령관으로 있었던 밴플리트 장군은 그를 즉각 보직해임하고 모든 전시 작전권을 미군이 가지고 가게 되었답니다. 


유재흥 장군은 7사단장, 2군단장, 3군단장에게 이르기까지 적군을 맞이하여 싸운 모든 전투에서 패전하였습니다. 그리고 현리전투에서는 도망을 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개전 초기 당시 탱크로 무장하고 내려오는 북한군을 일본 구식 소총과 미군에서 제공한 일부 M1 소총으로 무장하고 대결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7사단의 패인을 유 장군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고 증언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2군단장 시절 중과부적으로 중공군에 맞서서 싸우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 패인의 책임을 유 장군에게 돌릴 수 없다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리 전투에 대한 많은 기록은 어떻게 평가를 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중공군국군 3군단을 궤멸시킨 중공군


어차피 질 수밖에 없었던 전투에서 재수없게 유재흥 장군이 지휘관을 맡은 것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나라 치욕의 3대 패전에 이 현리 전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국군포로로 북에 있다가 복귀한 조창호 소위를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현리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답니다. 두분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조창호 소위는 유재흥 장군을 살아 생전 만나뵙고자 여러번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 장군은 끝내 외면을 했다고 하는군요. 


조창호 소위고인이 되신 조창호 할아버지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긴 글을 읽어주셨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유재흥 장군 모두 패전한 전투에서 전장을 이탈한 지휘관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명의 지휘관은 지원병력을 요청하기 위해 전장을 이탈했습니다. 다른 한명의 지휘관은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할까요? 



전쟁에 일어나서 승전을 하는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로 승전국이 될 수도 있습니다. 패전의 소식을 듣고 슬퍼할 수도 그리고 최종적인 패전국이 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패전한 지휘관과 승전한 지휘관을 바라보는 역사의 평가도 극과 극으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풍전등화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 승전과 패전의 소식은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현명한 대처로 평화롭게 앞으로 전쟁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